[가상시나리오] 하루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면: E1

우주를 거머쥔 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의 하루

 

역사적 순간: 비극을 1분 앞둔 고속도로

시간은 1977년 6월 16일, 미국 일리노이 주의 한적한 고속도로. 나는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이론물리학자, 이휘소(Benjamin W. Lee)가 되었다. 당시 나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는 등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많은 동료 학자들은 나의 노벨상 수상이 시간문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페르미 연구소의 회의를 마치고 가족이 기다리는 아스펜으로 향하는 길이다. 역사에 따르면, 나는 곧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하여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운명적 결정: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피로가 몰려온다. 역사 속 이휘소는 그대로 달렸지만, 나는 핸들을 돌려 가장 가까운 휴게소로 향한다. 단 10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기로 한 것이다. 이 사소한 결정으로, 나를 기다리던 죽음의 그림자는 텅 빈 고속도로 위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다시 시동을 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족에게로 향한다. 역사의 거대한 톱니바퀴 하나가, 커피 한 잔의 시간만큼 미세하게 어긋났다.

 

 

나비효과: 기초과학 강국 대한민국의 탄생과 새로운 과제

나의 생존이 불러온 2025년의 대한민국은 눈부시다. 나는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에 '과학의 기적'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안겨준다.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등대가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을 응용기술뿐만 아니라 순수 기초과학의 세계로 이끈다. 정부와 기업은 나의 조언에 따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초과학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낯선 이름이 많았던 한국의 근현대 과학계는 이제 세계적인 석학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2025년, 대한민국은 세계 3대 기초과학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여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실상부한 과학 선진국이다. '두뇌 유출'은 옛말이 되었고, 전 세계의 천재들이 대한민국의 연구소로 모여든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변화 속에도 복합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국가적 자부심이 된 '이휘소 신화'는 과학계의 다른 분야에 대한 불균형한 지원을 낳았다. 모든 과학 정책이 입자물리학과 거대과학 중심으로 편성되면서, 생명과학이나 환경과학 등 삶에 밀접한 분야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뎌졌다. 또한, 나의 정치적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들은 나를 '국가적 상징'으로 이용하려 들었고, 이로 인해 과학의 순수성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는 부작용도 겪어야 했다. 우리는 더 똑똑해졌지만, '과학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더 복잡하고 어려운 윤리적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야 하는 새로운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에필로그: 돌아온 현재, 남겨진 질문들

눈을 뜨자 2025년의 익숙한 현실이 펼쳐진다. 이천의 고뇌도, 이휘소의 환희도 모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이 남았다. 과연 더 나은 역사란 무엇인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역사의 본질은 아닐까? 우리가 내리는 최선의 선택이 후대에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역사 속 인물의 삶을 빌려 거대한 변화를 꿈꿨던 나의 상상 여행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영웅의 극적인 결정 한 번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이뤄내는 거대한 합창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합창 속에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하루가, 나의 선택이 먼 미래의 어떤 물줄기를 바꾸게 될지, 이제는 겸허한 두려움과 함께 나의 시간을 살아갈 차례다.